천지수(天池水)
이 설화는 백두산 인근 지역의 조선 민족들 사이에서 그리고 만주를 삶의 터전으로 삼고 있는 조선족들 사이에서 전승되고 있는 영웅전설이다. 정재호 외 <백두산 설화연구>(고대민족문화연구소,1992)에 수록되어 있다.
멀고 먼 옛날 백두산 일대는 산천경개 아름답고 물산이 풍부하여 살기 좋은 곳이었다 한다. 그러데 그 뒤 어느 날 흑룡이 나타나 불시에 강하의 발원지를 불 칼로 지져 이곳의 물은 죄다 말라 버렸다.
이때 이 근방에는 봉왕이 있었는데 그에게는 달덩이같이 고운 딸이 있었다. 천하절색인데다 재산 좋고 인품 좋아서 매일 수십을 헤아리는 중매꾼들이 드나들었고 심지어는 세상 여러 나라 왕자들도 청혼하러 사람을 띄워 보냈다.
하지만 처녀는 화단의 꽃이 매말라 죽고 초목과 오곡 또한 남김없이 말라 죽는 위급한 형세인즉 흑룡을 몰아내고 물을 되찾아 오는 총각만이 절세의 영웅이라 이런 신랑한테만 평생을 맡기겠다는 것이었다. 간혹 부모들이 꼭 마음에 드는 자리가 나면 딸을 권유해 보기도 했으나 그때마다 딸은 딱 잡아떼면서 이렇게 말했다.
“이처럼 부요 하고 아름다운 지방에 심술궂은 흑룡이 나타나 이곳의 물을 모두 말려버려 강산이 죄다 말라 들어 민심이 소란하고 천지가 황폐하였은즉 이런 참상을 보고 제가 가면 어디로 가고 간다 한들 무슨 기쁨이 있사오리까.”
이러니 그 부모들도 이 일에 한해서만은 막무가내였다.
바로 이러한 즈음 백두산 사람들은 백씨 성을 가진 총각을 두령으로 물을 찾아 싸우기를 탄원해 나섰으나 매번 흑룡이 조화를 부리는 통에 어찌할 수가 없었다. 하여 지쳐 죽거나 외지로 영영 떠나 버리는 사람이 기수부지였다. 이로부터 다시는 감히 물을 찾을 엄두를 못내는데 백 장군만은 단 혼자서라도 기어이 찾아오고야 말겠다는 결의를 버리지 않고 매일 삽을 들고 상상봉에 올라 땅을 파제꼈다. 하나 이럴 때마다 흑룡이 모진 조화를 부려 바위를 뽑아 굴리고 땅을 뒤엎어 놓곤 했다.
이 말을 들은 봉왕의 딸이 그곳으로 달려왔다. 백 장군이 보니 봉왕의 딸중 장중보옥 같은 딸이라. “공주께서는 귀한 옥체를 보중하시지 않고 이같이 위태로운 곳으로 왔나이까? 부디 옥체를 보중하셔 이 험지를 피해 주소서”라고 하니 공주는 눈물을 머금고 “장군님의 갸륵한 마음씨는 고마우나 저의 미소한 힘이나마 물을 찾는 장군님을 도울 수 있다면 이에서 더 기쁜 일은 없겠나이다.” 하고 나서 청석봉을 가리키면서 “예로부터 이르기를 옥장천의 물을 마시면 천하무적 장군힘이 솟구친다 하니 이제 석 달 열흘을 마신 후 일을 도모하신다면 꼭 성공하실 터이니 그리 아량해 주세요”라고 했다. 그로부터 백 장군은 공주와 더불어 매일같이 그 물을 마셨고 때로는 다른 일로 그 물을 마시러 가지 못할 때면 공주가 손수 그 물을 떠다 대접하곤 했다.
이렇게 석 달을 마시고 나니 과연 산더미 같은 돌도 들어 던질 수 있었고 훌쩍 한 번 몸을날리면 수십 길 되는 고목도 날아 넘을 수 있게 되었다. 이렇게 되자 백 장군은 그날 밤부터 흙을 다시 파제끼기 시작했는데 한 삽에 하나의 산 봉오리가 생겨나곤 하였다. 한 밤을 파제끼니 과연 지심 깊이에서는 낭랑한 물소리가 들렸다. 백 장군은 더욱 힘을 모아 또 한 삽 푹 파 제끼었다. 그러자 이번에는 밑으로부터 불 칼이 쑥 올라왔다. 백 장군은 칼을 들어 그 불 칼을 탁 찍었다. 그러나 그 불 칼은 움쩍도 않았다. 그가 다시 칼을 드는 순간 그 불 칼은 좌우로 요동을 치더니 그의 앞가슴을 쿡 찔렀다. 바로 이때 공주가 말 달려와 보니 백 장군은 만근 칼을 잡은 채 쓰러졌고 가슴에서는 피가 샘솟듯 막 솟구치고 있었다.
공주는 너무나 애통하여 백 장군의 몸에 마구 쓰러져 통곡을 하는데 줄 끊어진 염주처럼 눈물은 옷자락을 적시고도 남아 구덩이에 소리치며 흘러 들었다. 눈물이 백 길 구덩이에 차고 넘쳐 다시 그들 둘의 몸에까지 넘어 차게 되자 백 장군은 간신히 두 눈을 뜨고 공주를 보면서 너무 일찍 서둘러 경솔히 손을 쓴 자기를 질책하면서 용서를 빌었다. 백 장군이 소생한 것을 본 공주는 그 길로 옥장천으로 내 달려 갔다
이로부터 공주는 다시 옥장천의 물로 백 장군의 몸을 알뜰히 보살펴 주고 장수힘을 기르도록 했다.
몸이 완쾌해지고 무예도 더 익히게 되자 백 장군은 공주와 더불어 다시 흙을 파제꼈다. 하여 샘 구멍이 터지고 물은 점점 불어올라 천지 못을 이루게 되었다.
이때 흑룡은 남해 바다의 용왕의 딸을 희롱하여 색에 빠져 있느라고 이런 일을 통 모르고 있다가 이 소문을 듣고 부랴부랴 불 칼을 갖춰 가지고 달려 왔다.
백 장군이 보니 흑룡은 검은 구름을 몰아 타고 기세 사납게 달려드는지라. 만근 칼을 집어들고 흰 구름을 타고 맞받아 나아갔다.
이윽고 구름과 구름이 마주쳐 천지가 떠나갈 듯 굉장한 우렛소리가 진동했고 칼과 칼이 마주쳐 하늘을 가를 듯 뻘건 번갯불을 그어 놓곤 했다. 한식경 지나자 백 장군의 전신에서는 녹두알 같은 땀이 돋아났고 흑룡의 전신에서는 콩알 같은 땀이 흘러 떨어졌다. 다시 또 접전을 벌였으나 흑룡의 생각에 백 장군을 이겨 낼 가망이 없는데다 공주까지 백 장군을 도와 나서는지라 마지막으로 불 칼로 천지수를 지져 놓고 도주하려고 했다.
하여 흑룡은 불 칼로 천지수를 내려 찍었다. 이 찰나 백 장군은 흑룡의 불 칼 중동(중간 부분)을 슬쩍 비켜 올렸다. 그 통에 흑룡의 칼은 뭉텅 끊어져 백두산 북편 벼랑 바위에 가 철렁 떨어졌다. 이에 바위 벼랑이 쭉 쪼개져 물 골이 나게 되었으니 이로부터 천지 수는 북쪽으로 흘러나가게 되었던 것이다.
흑룡을 몰아내고 물을 되찾은 백 장군과 공주의 기쁨은 한량없어 이로부터 깊은 천지 물 속에 아름답고 단란한 수정궁을 짓고 천지수를 지켜 천복만복을 누렸다 한다.
천지수는 맑고 맑나니 어이하여 그처럼 맑은가? 그것은 공주의 해맑은 마음씨를 닮아서이고 비 온 뒤끝 천수가 오색영롱한 것은 싸워 이긴 그들 부부의 기쁨이 천지수에 어리기 때문이며 칠색의 무지개는 그들이 칠색 비단 발을 드리워 놓고 승리를 경축하는 것이라 한다.
지금도 백두산에는 무시로 흑운과 백운이 교차하여 몰려가고 몰려오면서 번개가 번뜩이고 천둥이 울고 비가 오고 우박이 쏟아 붓기도 하며 그 천지조화가 실로 무쌍한데, 이것은 그때 백 장군에게 패한 흑룡이 그때 일이 내키지 않아 몇 번씩 싸움을 걸고 들기 때문이라고 한다.
하지만 백 장군 부부가 수정궁에 앉아 오늘까지 천지수를 지켜 내고 있거늘 흑룡이 아무리조화를 부린다 해도 무슨 소용이랴!
2014/3/17(월)
한국의 전설과 설화를 찾아 10-천지수 
